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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너와의 대화를 정리하다 알았어. 이제 내 사랑에는 너밖에 없다. 넌 나에게 뿌리내렸고, 난 네게 영양분을 빨아 먹혀 죽을 거야. 내가 죽더라도 네 뿌리는 내 몸에 깊숙히 박혀 있을 거고, 넌 죽을 때까지 나의 죽음을 끌어안고 있어야 하겠지. 그걸로 난 만족한다.

공주

내 외갓집 뒤뜰에는 대나무들이 줄지어 있었다. 어릴 적 내 몸집의 작음으로 인한 탓인지는 몰라도 그 대나무의 줄지음을 보며 나는 꼭 그 뒤에 커다란 대나무 숲이 있을 것 같았다. 여름에 외갓집에 내려왔을 때면 한 번 쯤은 그 대나무를 본 것 같다. 대나무를 보러 간 것은 아니고 사촌들과 놀며 그 뒤뜰을 지나친 것일 뿐이지만 연이어 선 대나무들은 내 기억에 ...

타임머신은 벌써 있는지도 모른다. 각종 물건들은 다 과거를 품고. 예측하지 못 하는 순간에 그 과거들을 발산한다. 과거의 광선에 나는 정신이 아득해지고, 추억의 향들이 삼켜지면 나는 어느새 과거에 있다. 과학자들 말로, 타임머신이 있더라도 미래로는 못 간단다. 모든 물건들은 미래를 품을 수는 없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품을 수는 없다. 세상의 모든 것은 시...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라는 게 다른 뜻이 아니고 내 인생에도 누군가에겐 영화가 될 부분이 펼쳐질 얘기라는 거다. 지금 힘들다면 그건 주인공이겪는 시련인 거고, 지금 기쁘면 영화의 명장면인 거다. 어쩌면 내 인생에서는 시련을 겪는 게 명장면일지도 모른다. 시련을 겪는 장면이 명장면이라면, 내가 악인이 아닌 이상, 그 시련을 멋지게 이겨낼 수 있다는 거다. 내...

니들이 여기에 있기 전부터 나는 여기에 있었다 고 거대한 인간들 아래의 콘크리트 그 아래에 내가 있다 내 존재는 감춰졌으며 내 외침은 입막음당한다. 커다란 재앙들에 짓눌려 있는 그 패배의 권력 아! 이 역겨운 쾌락을 너희는 알 수가 없다. 내 검은 몸뚱아리를 오밀조밀 모아 단단하게 굳힌다. 저 무거운 재앙들에 짓눌리지 않도록 날개를 잘 닦는다. 니들이 여기...

낡은 아파트의 여름은 뒷산의 나무들로부터 오는 샤- 한 속삭임과 바람과 향기. 단지 내 하나 있는 놀이터의 아이들이 종일 뛰노는 소리와 활기. 모의 여름 고사는 당신의 여름을 작성하라 한다. 내가 거기에 답한 건 낡은 아파트와, 그 안 놀이터의 아이들. 여름이 적힌 시험지에서는 녹색 향이 난다.

이제 사랑한다고 외칠 사람도 없다 황량한 광야에서 바닥이 쩍쩍 갈라져 저 아래 지옥불이 다 보이는 이 넓디넓은 광야에서 나는 허공에다가 대고 사랑한다고 외친다 그 소리 하는 것도 나고 듣는 것도 나다 쏟아 부은 감정을 내가 죄다 맞는다 나는 지금 사랑을 원하지 않는다 사랑을 원한다면 저 지옥불에 몸을 던졌겠지 나는 내 감정을 쏟아내길 원한다 내 감정을 온전...

봄은 소리도 없이 꽃을 터뜨렸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초록도 아닌 연두 작은 잎사귀를 겨우 내밀고 있던 것들이었다. 수줍게 눈만 빼꼼 내밀던 것들을 어느 무명 화가가 슥 슥 붓놀림을 하여 터뜨렸다. 봄은 그 겨울 동안 품에 안고 있던 5 도씨를 터뜨리며 뱉어내었다. 겨울 몇 달 동안 소중하게 안고 있던 것은 이 봄을 밝히기 위한 것이었다. 할 일을 다 한 ...

사랑한다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노래의 전주를 듣는 새벽이 있다. 다들 잠들어서 조용한 새벽에, 내 방에서만 울리는 노래를 들으며 떠올린 네가 아무래도 내게 사랑이었던가 보다. 다 어두워진 창 밖으로 몇몇 불 켜진 아파트 네모칸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하고 만다. 당신도 한때 사랑이었던 그 누구를 떠올리고 계신지요.

시골에 내려갔을 때 피곤해서 쓰러진 집을 본 적이 있다 추운 땅바닥에 기별도 없이 쓰러진 집 위로 다정하게 이불을 덮은 이름 모를 식물의 넝쿨도 쓰러진 집 안부나 물으러 종종 얼굴 비추는 고양이나 무명의 새나 새벽 안개 노을 같은 것도 집을 깨우러 온 나는 그냥 그것들을 두었다 잠을 곤히 자며 웃는 얼굴을 보았다

시 쓰다가 잠 드는 밤에는 네가 있다 시를 쓴다는 게 너를 그린다와 동어라는 것을 네가 그것을 아랴 사랑 고백을 삿포로에 가자는 말로 대신한 이의 마음을 너는 모른다 그런 너는 아무래도 시를 쓰는 이유를 대충 넘겨 짚으리라 차라리 그러는 편이 낫다 나는 나는 아직 시를 쓰는 밤에 널 있고 싶다

내 억센 머리카락이 네 닿으면 너는 간지럽다고 했다 아프다는 말 대신 아무래도 그치 너도 그런 게 아니었을 텐데 참 내가 몰랐다 너라고 억센 게 안 억셌을까 나라서 그런 것도 아니었고 너라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때라서 그랬던 거다 그때라서 원래 누구든 그때는 그런 거다 그 그때는 너무도 짧고 그래서 그걸 이어가려고 갖은 노력을 다 네가 억셈을 억셈이라 부...